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제목 | 주님 만찬 성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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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1.04.02 | 작성자 | 세바스티아노 수사 |
| 첨부파일 | 조회수 | 7085 | |
제1독서: 탈출 12,1-8.11-14제2독서: 1코린 11,23-26
복 음: 요한 13,1-15
오늘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최후의 만찬은 마지막 수업입니다. 원래 마지막 수업은 그간 해왔던 수업들을 총정리 하면서 핵심정리를 하는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며 가르쳐주시는 항목에 빨간 펜으로 별표 그리고 밑줄 쫙쫙 긋는 시간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성찬례의 원형이고, 그래서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는 성찬례의 제정을 기념하는 미사라고 배워 알고 있었는데 오늘의 복음 말씀은 약간 뜬금없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 모두 주님께서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라고 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모습을 최후의 만찬 장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마태26,26-30/마르14,22-26/루카22,17-20). 그런데 요한은 전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오늘, 교회가 이 요한복음을 매년 주님 만찬 미사의 복음으로 택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성찬례가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건 우리가 너무 뻔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만큼은 좀 색다른 버전의 얘기를 들어보자며 요한 복음을 주님 만찬 미사의 복음으로 재미 삼아 채택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족례와 성찬례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도 당연한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겠지만 진짜 현실은 하느님이 먼저, 그리고 늘 사람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사람들이 우선 알아차리고 기억해주기를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바라고 계십니다. 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바로 세족례와 성찬례이죠. 그런 의미에서 세족례와 성찬례는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세족례는 성찬례의 심장입니다. 그리고 성찬례의 정신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육화해 들어갈 때 발현되는 것이 세족례입니다. 여기에서의 ‘00례’를 단순히 예절이나 형식으로 화석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례’는 일종의 압축파일이죠. 우리의 일상 안에서 ‘압축풀기’를 해야 그 ‘례’가 의미 있어 지는 겁니다.
하느님이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발을 씻어주고 있고 주님이 종의 발을 씻어주고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고 있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발을 씻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족례입니다. 높음이 낮음 밑에 무릎을 꿇고 낮음을 섬깁니다. 깨끗함이 더러움을 단죄하지 않고 온 몸으로 그것을 씻어줍니다. 그냥 아름답고 멋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현실은 이미지보다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높음이 낮음보다 더 낮아져 낮음을 섬긴다고 그 낮음이 황송해하고 감사해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런 일은 잘 안 생깁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감사함을 늘 가슴에 품고 은혜를 갚습니다. 많은 낮음은 처음에만 고마워합니다. 나중엔 스스로를 낮춰 낮음을 섬기는 사람을 만만히 보고 우습게 압니다. 자기들의 과실로 못 살고 문제가 생기는 것을 다 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힘을 안 쓰고 있는 사람을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시합니다. 웃기는 건 자기들을 힘으로 막 다루고 누르는 사람 앞에선 꼼짝도 못하고 어쩌다 한 번 하사되는 호의에 감지덕지해가며 그 사람을 우상숭배하듯 추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 얍삽함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한 두 번 배신을 당해봅니까? 알아도 너무 잘 알고 계시죠? 예수님도 많은 걸 알고 계셨습니다. 이 밤이 이 지상 생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요한13,1). 미치도록 두려운 시간을 견뎌내고 계신 겁니다. 생존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꾹꾹 누르고 계신 겁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 넘길 자를 알고 계셨습니다(요한13,11). 그런데도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계십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유다의 발도, 세 번이나 신의를 저버릴 베드로의 발도, 믿음이 부족한 토마스의 발도,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하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발도, 얼마 안 있으면 자기를 버리고 다 도망갈 제자들의 발도 묵묵히 다 씻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발길질하는 인간의 발을 그렇게 씻어주고 계십니다. 사랑이 그렇게 시키는 일이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문장 한 마디는 무시무시할 정도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사랑하기는 그나마 쉽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우리의 체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경우도 부지수이고 설사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식어간다는 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고 세상이 이런데 나를 이용하려 하고, 나를 무시하고 배신하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어려운 걸 하고 계신 겁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아무런 차별이나 판단 없이 무한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 받고 있음을 온 몸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사랑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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